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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위안이 되는 시_정미주내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 2023. 10. 14. 10:58
감히 위안이 되는 시 저는 길에 깃든 공학과 미학을 사랑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습니다. 울퉁불퉁한 시골길, 빌딩 숲으로 이어지는 길, 몸을 비집고 들어가야 되는 좁은 길, 새와 버려진 개와 고양이가 다니는 동물의 길, 공중에 열리지 않는 문이 있는 길, 떠나지 못하는 존재들이 머무는 계단이 있는 길을 떠올려 봅니다. 검문이 없는 세계 지도를 클릭하면 손끝에서 국경은 사라지고, 길은 확장하면서 소멸됩니다. 길 위에서 잠이 들고,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공식을 발견하는 수학자이자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끝없이 갈라지는 길 위를 서성였습니다. 돌이켜보면 길은 사람이었고, 저 또한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언제까지 길 위에 머물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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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낭독자를 위한 시_유현아내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 2023. 10. 14. 10:57
길 위의 낭독자를 위한 시 소리 내어 시를 읽는다는 것은 사소하지만 어려운 실천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요새 ‘투쟁’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습니다. 투쟁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무거운 한 단어에 곰곰 생각하며, 함께하는 어떤 행위에 대해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를 질문합니다. 우리가 아는 온 우주의 기억들은 투쟁의 결과물 아닐까요. 그렇게 결론 내리면 ‘투쟁’이라는 단어는 곁과 곁을 들여다보는 한 장면으로 따듯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한 계절에 한 편의 시를 기억하기 위해 많은 계절의 날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정미주 시인의 시 은 어느 더운 여름날 광장이었던 그곳 근처에서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낭독 투쟁’의 장소에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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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가 좋아한 정미주의 시내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 2023. 10. 14. 10:42
우수 사원 아침방송 진행자는 우산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사연이 쏟아졌지만 속마음을 다른 누군가가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괄호 속으로 감춰졌다 가둬졌다 댄스곡이 흐르는 침실 아침마다 독재자는 양성된다 휘파람은 어떻게 통증을 불러들이나 허리를 휘청이면서 문을 연다 우산의 손잡이를 번갈아 잡으며 달라진 손바닥의 두께를 잰다 우산을 활짝 펼친 남자가 회전문 안으로 들어간다 부서진 보도블록은 회전하는 발목들의 내일이다 날씨의 기분으로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이름을 감춘다 태몽이 없는 사람들을 찾으러 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내일 신문 발행을 잠시 미뤄둔다 긴 회랑 안으로 날아든 비둘기가 햇볕을 쪼개고 있다 예각으로 찢어진 우산을 펼치고 빛을 감시한다 비둘기는 잘못 알고 있다 독재자는 누구나 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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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왜 쓰세요?내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 2023. 8. 11. 09:42
시를 왜 쓰세요? 시를 왜 쓰세요? 누가 물으면 예전에는 아름다운 것을 찾고 싶어서 쓴다고 답했고, 그다음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요, 라고 답했습니다. 요즘에는 농담을 반쯤 섞어 세계평화나 인류를 위해 쓴다고 말을 하긴 하는데요. 어쩌면 저의 이런 대답을 시시한 것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니 인류니 실감할 수 없는 것들일 뿐이고, 그런 것들을 내세우는 일은 조금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할 테니까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신다면 시라는 것은 결국 실감할 수 없는 것을 감각하게 만드는 일이고, 세계니 인류니 하는 것들을 실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셨나요. 제 말이 맞지요? 잘 모르는 것들과 가까워질 수도 있고, 익숙한 것을 낯설고 서먹하게도 만드는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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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가 관여한 좋음내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 2023. 8. 11. 09:41
온 우주가 관여한 좋음 '이소연이 좋아한 그 사람의 시'는 조금 긴장된다. 내그시 운영진이 있지만 도대체 선배들은 내그시 선정에 대해서라면 조금도 관여하는 바가 없고, 다 내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오늘낭독회 자리에서 내 마음을 다 들켜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심장이 쪼그라든다. "유현아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는 사라져가는 어느 골목에서 마주친 선명한 시였고, 김현이 좋아한 그 사람의 시는 두 시인을 향한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다. 마음을 들키는 저마다의 고유한 문장들을 가지고 있었구나. 선배들과 비교하면 내가 가진 마음을 들키는 문장은 좀 평범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지난 계절에 내가 읽은 시 중에서 가장 좋았던 시를 선정했다. 좋음을 느끼는 데에는 온 우주가 관여한다. 그냥 방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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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이 좋아한 황인찬의 시내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 2023. 8. 11. 09:35
학교를 안 갔어* 일단 전철을 탓고 시를 벗어났어 다들 학교도 안 가고 회사도 안 가고 뭐하는 걸까 나에게는 변명이 많았지 현장학습을 하러 가는 날이에요 집에 급한 일이 생겼어요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전철은 달렸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들 강물에 반사되는 빛 기관사가 차내에 계신 분들께 알리는 소리 다들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나도 사람에게 할말은 없었어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