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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가 관여한 좋음내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 2023. 8. 11. 09:41
온 우주가 관여한 좋음
'이소연이 좋아한 그 사람의 시'는 조금 긴장된다. 내그시 운영진이 있지만 도대체 선배들은 내그시 선정에 대해서라면 조금도 관여하는 바가 없고, 다 내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오늘낭독회 자리에서 내 마음을 다 들켜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심장이 쪼그라든다. "유현아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는 사라져가는 어느 골목에서 마주친 선명한 시였고, 김현이 좋아한 그 사람의 시는 두 시인을 향한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다. 마음을 들키는 저마다의 고유한 문장들을 가지고 있었구나. 선배들과 비교하면 내가 가진 마음을 들키는 문장은 좀 평범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지난 계절에 내가 읽은 시 중에서 가장 좋았던 시를 선정했다.
좋음을 느끼는 데에는 온 우주가 관여한다. 그냥 방구석에서 읽었으면 그렇게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황인찬의 시 <학교를 안 갔어>는 도심시 방송 녹음할 때 처음 들었다. 도심시는 내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인데, 게스트는 출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장소에 대해 시까지 써야 한다. 그래서 섭외가 좀 까다롭다. 시인들은 시를 쓰는 사람인데 시 쓰는 걸 왜 이렇게 부담스러워하는지... 이렇게 잘 쓸 거면서. 그때 인찬이가 선택한 장소는 도봉산역이었다.
첫 줄부터 소름이 끼쳤다.
"일단 전철을 탔고"
그래 나도 일단 이 시를 내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로 선정할게.
"시를 벗어났다"
나도 시를 벗어났다.
전철을 타고 가뿐하게 시를 벗어날 수도 있는 거였다. 인찬이가 부천에 살았으니까 부천시를 벗어난 것이거나 안양에서 고등학교에 다녔으니까 안양시를 벗어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시'를 쓰며 사니까 시를 벗어난 것일 수도 있는 이런 중의적인 표현을 무심히 툭 던지는 태도에 놀랐다. 시를 벗어났다는 말 때문에 시 안에 머물렀던 너의 시간을 본 것 같았다.
너의 시에는 자꾸 새로운 좋은 면을 발견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도 다 말하지 않는 밀당도 있다. 너 연애 잘하겠다. 황인찬.
이를테면 인찬이가 가장 자신 있는 신체 부위가 자기 콧구멍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는 "누나, 진짜야. 내 콧구멍 좀 봐봐." 할 땐 어이가 없었다. 보이는 데만 가꾸는 데도 힘에 부쳐 죽겠구만. 콧구멍은 또 왜? 하면서도, 얼굴 중에서도 콧구멍을 발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게 좋다. 그걸 선뜻 말해주는 세계가 좋고 작고 실없는 농담 속에 깃든 마음들을 되짚어 보는 나 자신까지도 좋아진다. 솔직히 인찬이 콧구멍이 뭐 대단히 아름다운 건 아니다. 그래도 아름답다고 믿는 마음이 있고 그런 마음은 자꾸 뭔가를 들여다보게 하니까 아름답다.
<학교를 안 갔어>라는 시는 짧다.
도심시에서는 게스트가 써온 시가 대본의 역할을 하므로 이렇게 짧은 시를 보고는 방송 분량을 뺄 생각에 걱정부터 앞섰다. 그런데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얼마나 집에 보내기 싫은지... 가히 좋은 시다. 이 시를 읽고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한 달을 보냈다. 시에 어울릴 만한 트로피(플레이모빌)도 준비하고 부상은 공릉동 꿈길장에서 김현 시인과 함께 골랐다. 그리고 상금을 준비하느라 일을 좀 열심히 했다.
작지만 크게 받아주길 바란다. 올 여름, 내가 좋아한 황인찬의 시 때문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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